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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에 대해서 포스팅을 작성을 했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똑똑히 알게 하는 장면입니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대해서 글을 유심히 보면서 왜 이런 중동에서 자주 충돌하는지 알아봅시다.
이스라엘 라파 지상전 예고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최남단 국경도시 라파에서 지상전을 예고했습니다. 민간인 피해 우려가 제기되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민간인 대피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11일(현지시간)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보루인 라파에 남아있는 하마스 테러리스트 부대를 소탕할 것"이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라파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에서 지고 하마스를 그곳에 남겨두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승리가 코앞에 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네타냐후 총리는 라파와의 지상전이 언제 시작될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라파는 이집트와 국경을 맞댄 국경도시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의 고향입니다.
라파는 가자지구 전체 인구 240만 명의 절반이 넘는 약 14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라파에는 민간인들이 대거 체류하고 있어 이곳에서 지상전이 시작되면 민간인 피해가 클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민간인이 떠날 수 있는 안전한 통로를 제공하면서 그렇게 할 것"이라며 민간인 보호를 고려하지 않은 군사작전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입장에 "동의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피난민들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질문에 "라파 북쪽에는 (하마스를) 소탕한 곳이 많다"며 "자세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둔감하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민간인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우리의 전쟁 노력의 일부이며, 민간인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한 하마스의 활동의 일부입니다."
하마스 라파 지상전 임박 이스라엘 총리 승리 눈앞,
네타냐후 출생 나이 재임기간 프로필
벤저민 네타냐... 네타냐후
출생. 1949년 10월 21일(74세) 텔아비브
재임 기간
제9대 수상 1996년 6월 18일 ~ 1999년 7월 6일
제9대 총리의 연임 2009년 3월 31일 ~ 2021년 6월 13일
제9대 총리의 3선 2022년 12월 29일 - 현재 이스라엘의 제9대 총리.
그는 11선 의원(리쿠드당, 비례대표, 12-24대)입니다. 총리 외에도 그는 국방부 장관, 외무장관, 보건부 장관도 역임했습니다. 그는 역사상 이스라엘 총리로서 가장 긴 임기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일생일대의 이스라엘 건국 이후인 1949년 텔아비브에서 태어습니다.
아슈케나짐 유대인. 바르샤바 출신 대학교수인 아버지 벤지온 네타냐후(בנציון נתניהו)[8]를 따라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80년대 후반까지 군 복무 6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국에서 활동했습니다. MIT에서 석사를 마친 뒤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서 일했습니다.
1982년에는 워싱턴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했고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유엔 대사를 지냈습니다.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이츠학 샤미르 정권에서 장관을 지냈습니다.
집권 1기 (1996~1999) 그 후 리쿠드의 지도자가 되어 1996년 총선 출구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를 누르고 13대 총리가 되어 당시 야세르 아라파트와 많은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러나 부정부패 의혹에 더해 이스라엘 경제도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쇠퇴했고 1999년 총선과 총리 선거에서는 총리로서 정계에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리쿠드의 아리엘 샤론이 2001년 총리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후, 그녀의 운세는 다시 풀리기 시작했고, 리쿠드의 당이 2003년 총선에서 승리한 후, 그녀는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화려한 정계 복귀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강경 발언을 이어가며 온건파로 돌아서자 아리엘 샤론 총리의 가자지구 유대인 정착촌 철수 계획에 적극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샤론 총리와 격렬한 논쟁 끝에 장관직을 사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샤론 총리가 리쿠드를 떠나 중도 성향의 카디마당을 새로 만들었지만, 2006년 총선에서 12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네타냐후 총리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잔류파 리쿠드당은 한 자릿수 득표율을 유지하는 참패(8.9%)를 기록했습니다.
2기(2009년~2021년) 하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이 좋지 않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불황으로 지지율이 떨어질 조짐을 보이자 네타냐후 총리는 카디마가 무르익었고 카디마에 실망한 우파의 지지를 받았다며 강경 수사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2009년 총선에서 카디마에 근소한 차이(카드마 22.5% 28석, 리쿠드 21.6% 27석)로 뒤졌지만 전반적으로 우파가 우세해 두 번째 총리직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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